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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語から韓国語への翻訳依頼] パフォーマンスの一つ一つに含蓄があるのだろうなあと思った。しかし一つ一つの動作やセリフや表情に思いをはせるというの個人的には辛かった。というのは、わたしの...

翻訳依頼文
パフォーマンスの一つ一つに含蓄があるのだろうなあと思った。しかし一つ一つの動作やセリフや表情に思いをはせるというの個人的には辛かった。というのは、わたしのこのパフォーマンスに対しての理解、前提がほとんどなかったからだ。そしてそれを乗り越えてまで理解したいとまでは思わなかった。

「ステージを見た」という体験の記憶よりも、一か月前からの三通の手紙のやりとりも含めて、長い時間をかけてひとつの大きな経験をした、という思いが強い。

いい時間を過ごしたという思いは今でも感じている。
学生の時に知った「悟りを開いたものは次々と崖に身を投げた」という言葉を思い出した。これは「無」という境地を知り、それで身を投げたのだが、知り得た時、もうそこにはいられないのかもしれない。ラストシーンにダンサーが走り去る姿をみてそう思った。
これは始まりでこれからどうなるのか気になった。

ダンスの公演というよりは、あの場に起こったことの一部が自分で、一部が雨で、一部が演者たちだった気がする。

白い空間、歩く人々の様子、鳴き声のような声、雨の音は何となく意外と記憶に残っているなと思う。
まるでマンシヨンに暮らしているそれぞれの部屋の住人のようにバラバラの一人の世界がひとつの舞台に並行していて、それが、切り絵とともに、皆がひとつの空間を共有し、中心に関心を持ち微笑や好奇心が形づくられ、すれちがい、風のように去っていったり、

出会った者たちが、互いにまるで恐れを感じて、
手を握らずにすれ違ったあと、なにか、他者によって言葉や観念の存在に気づき、背中を異物が這い回るような、翼が生えるような、苦しみの場面が特に印象に残った。

時間の体感がゆるやかになる経験だった。
一か月前に送られてくる手紙を読み進めると会場にたどり着く、という形式の作品であったため、長い時間の中で作品に触れられてるような感覚になり、他の芸術の鑑賞方法とは一線を画す様で、新鮮に感じられた。
通常、作品と出会って、鑑賞して、反芻する形式だが、本作は、作品そのものに実際出会うまでの道のりが長く、作品の一端を時間をかけて辿っていく過程があることが、作品に触れる時間を長大にしてくれ、作品に自身も溶け込んでいくような気がして、それが、ある意味では贅沢な鑑賞方法のように思った。
通常は、観劇の予定を入れる際は、iPhoneにスケジュールを書き込むだけだが、本プロジェクトで興味深かったのは、それまでに定期的にアラートのように、手紙が届く、という点だ。その手紙に「返事を出す」ということは、公演までの期間にもよるが、負担になりかねない。しかし、適度な負担、鑑賞側も観劇の空間を作っているという心がまえをうながすという積極性を生み出す可能性はあると感じる。

簡潔に言う、短歌にしてみる。
まず風がうまれて言葉がついてくる背(せな)に翼の生える苦しみ
会場で見せてもらったものは、わたしに新しい言葉をもたらした。それぞれの得意を、音を、ことばを、かたちを、からだを、声を、きかせてもらうと、宙で攪拌されたそれらが、走り去って雨に混じるそれらが、皮膚に染み込むようだった。その時間を、空間を、書きとめたいと思った。思いながら、駅の自販機で買った、ペットボトルのあったかいほうじ茶ラテが、思いのほかおいしくなかったことを考えていた。そして、あした捨てようと思っていたネイビーのワンピースを、やはり捨てないでいようと決めた。

たどり着いてから会場にいる間、すごく特別な場所の様に思えた。
この街の誰も、この倉庫でこの様な特別なことが起こっているのは知らなくて、
もちろん東京にいる友達も、知り合いも、両親も、みんな私の体験を知り得ないということが、
とても素晴らしいことの様に思った。

今思い返すと、全体像よりも、フラッシュバック的に風景がよみがえる。
その中でもやはり音(「はもん」という楽器)に感じた身体的感覚はしっかりと残っているようだ。

公演を体験後、会場から出た後、身体がすっきりしていたように記憶している。


激しい雨で遠い初めての場。建物の中からかすかに光が漏れている。不法侵入になってしまうのだろうか?ドキドキしながらロープの先を歩いて行きなんとか入れるスペースがあり敷地に入る。到着出来たようだ。不安からは解放されたがこの時は公演への期待感は全くなく、なぜこんな思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怒りしかなかった。

手紙を辿って会場に赴くのは、観客にとって公演を見る以上に身体的に動きが必要で、珍しいのではと思った。意識と無意識の境目に切り込んでいく様な。また体験したい気持ちになる。


手紙は「どうなの?これ?」と思ったが、レンガ蔵のパフォーマンスはとても好き。あの場所でやるのは初めてかと思うが、すごく馴染んでいたと感じる。これからもカンパニーのダンスを楽しみにしている。

身体にずしっと残るものもあれば、何度でも、何度でも反芻しないと消えていくものもある。

自分の記憶の中にある前橋の明るい風景と当日みたものとの違いや、自分の身体が老いていっているのではという問いを、公演をみながらぼんやり考えていた。私と過去が問いを投げかけあう時間でもあった。
painrain さんによる翻訳
하나하나의 퍼포먼스에 함축적인 의미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각 동작이나 대사, 표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무척 즐거웠다. 나는 이 퍼포먼스에 대해 아는 것이나 기본적인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넘어설 만큼 이해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공연을 봤다'는 경험에 대한 기억보다 한 달 전부터 오고간 세 통의 편지를 포함해 긴 시간에 걸쳐 큰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더 크다.

아직까지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학생 시절에 알게 된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차례차례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는 '무'라는 경지를 깨달았기에 몸을 던진 것이지만, 깨달은 순간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용수가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는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무용수의 공연이라기보다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일의 일부가 나, 일부가 비이고, 일부가 연기자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얀 공간, 걷는 사람들의 모습, 우는 듯한 목소리, 빗소리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기억에 남는다.
마치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각 집 주민처럼, 제각각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하나의 무대에 나란히 펼쳐져 있고, 오려낸 종이와 함께 모두 하나의 공간을 공유한다. 그 중심에는 관심을 보이는 미소나 호기심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스쳐지나가거나, 바람처럼 가버리거나,

만난 이들이 그야말로 서로 두려움을 느끼면서
손을 잡지도 않고 지나쳐버린 뒤, 타자를 통해 말과 관념의 존재를 깨닫고 등에 뭔가 이상한 게 기어다니는 듯한, 날개가 생겨나는 듯한 고통스러운 장면이 특히 인상에 남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경험이었다.
한 달 전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나가며 공연장에 도착한다는 형식의 작품이었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작품과 접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예술 감상법과 확실히 달랐기 때문에 신선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는 작품과 마주하고, 감상하고, 반발한다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 작품은 작품 그 자체와 실제로 만날 때까지의 여정이 길다. 시간을 들여 작품의 일면에 다가간다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작품과 접하는 시간을 무척 길게 제공하여 나 자신이 작품에 녹아들어간다는 기분이 들고 그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사치스런 감상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관람 일정은 아이폰의 미리 알림에 적어둔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공연 전에 정기적으로 알람이 울리듯이 편지가 온다는 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 편지에 '답장을 한다'는 것은 공연 전에도 부담이 된다. 하지만 적절한 부담감이며, 관람자도 관람 공간을 만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끔 촉구하는 적극성을 만들어내는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간결하게 단가로 표현해보겠다.
바람이 일고 말이 뒤따르는 등에서 날개가 돋는 괴로움
공연장에서 보여준 것은 내게 새로운 언어를 부여했다. 각각의 특기를, 음을, 말을, 형태를, 몸을,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하늘에서 뒤섞인 그것들이, 쏟아지는 비에 뒤섞인 그것들이 피부에 스며드는 듯했다. 그 시간을, 공간을 써서 붙들어두고 싶었다. 그렇게 바라면서 역 자판기에서 산, 페트병에 든 따뜻한 호지차라테가 생각만큼 맛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버리려 했던 남색 원피스를 역시 버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도착해서 공연장에 있는 동안 매우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 동네에서는 이 창고에서 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물론 도쿄에 있는 친구, 지인, 부모님, 그들 모두가 내가 한 체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매우 멋진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 돌이켜보니 전체가 다 기억나기보다 플래시백처럼 풍경이 되살아난다.
그중에서도 역시 음('파문'이라는 악기')을 통해 통해 느낀 신체적 느낌이 분명히 남아 있는 듯하다.

공연을 체험하고 공연자에서 나온 뒤 몸이 상쾌해진 듯했다.
세찬 비를 맞으며 처음 가보는 먼 공연장을 찾았다. 건물 안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불법침입이 되는 건 아닐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로프 끝을 따라 걸었더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부지로 들어갔다.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다. 불안한 마음에서 해방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공연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없었고 왜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지 화가 나기만 했다.

편지를 따라 공연장에 도착하게 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공연을 보는 것 이상으로 신체적인 움직임을 요구하는, 매우 드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깊이 파고드는 듯한 방식이다. 또 체험해보고 싶다.
편지를 봤을 때는 '이게 뭐지?' 싶었지만 렌가구라에서 있었던 퍼포먼스는 무척 좋았다. 저런 곳에서 하는 건 처음이 아닐까 싶지만 무척 친숙했던 것 같다. 앞으로 있을 무용 공연도 기대된다.

신체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있는가 하면 계속해서 반추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도 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마에바시의 밝은 풍경과 그날 보았던 풍경의 차이와 내 몸이 늙은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 공연을 보면서 어렴풋이 생각했다. 나와 과거가 서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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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yac で翻訳した結果

依頼文字数
2119文字
翻訳言語
日本語 → 韓国語
金額 (スタンダード依頼の場合)
19,071円
翻訳時間
約12時間
フリーランサー
painrain painrain
Standard
この度はご覧いただきまして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韓国語ネイティブの翻訳者、池妃苑(チ・ビオン)と申します。
出版社の編集者を経て、2013年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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